성경을 문자로만 읽을 때 놓치게 되는 복음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진지하게 읽고, 말씀대로 살아가려는 태도는 매우 중요합니다.
사랑하라, 용서하라, 거룩하라, 섬기라, 간음하지 말라, 선을 행하라. 이런 말씀들은 분명히 성경 안에 기록된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하지만 여기서 반드시 조심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성경을 단순히 “하라, 하지 말라”는 도덕적 명령의 책으로만 읽는 것입니다.
성경을 읽는 것은 중요하지만, 성경의 문자에만 머물면, 우리는 성경이 가리키는 더 깊은 중심을 놓칠 수 있습니다. 성경의 중심은 인간의 행위가 아닙니다. 성경의 중심은 예수 그리스도이며, 그 절정은 십자가입니다.
성경에는 문자 너머의 메시지가 있다
성경에는 누구나 읽을 수 있는 문자가 있습니다.
“사랑하라.”
“용서하라.”
“거룩하라.”
“섬기라.”
“선을 행하라.”
이 말씀들은 분명히 성경의 문자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 명령들을 단순히 인간이 자기 힘으로 지켜서 의로워지라는 방식으로 주지 않았습니다. 성경의 명령은 먼저 인간의 한계를 드러냅니다. 사랑하라는 말씀 앞에서 우리는 자신이 얼마나 온전히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인지를 깨닫습니다. 용서하라는 말씀 앞에서 우리는 자신이 얼마나 쉽게 미워하고 붙들고 있는 사람인지를 보게 됩니다. 거룩하라는 말씀 앞에서 우리는 자신 안에 얼마나 많은 죄와 욕망이 있는지를 발견합니다.
그러므로 성경의 명령은 단순히 “더 착하게 살아라”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명령들은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으로 이끕니다.
“나는 내 힘으로 하나님의 기준에 이를 수 없구나.”
“나는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구나.”
“그래서 예수님의 은혜가 필요하구나.”
성경을 바르게 읽는다는 것은 문자에 기록된 명령을 무시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명령이 결국 나를 어디로 이끄는지 보는 것입니다. 성경의 문자는 결국 예수 그리스도를 향해야 합니다.
바리새인들은 성경을 몰라서 예수님을 거부한 것이 아니다
예수님 당시 바리새인들은 성경을 모르는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누구보다 성경을 잘 알았습니다. 율법을 외웠고, 규정을 지켰고, 안식일을 철저히 지켰습니다. 종교적으로 보면 매우 경건한 사람들이었고, 도덕적으로도 자신을 엄격하게 관리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성경을 많이 알고, 율법을 열심히 지키던 사람들이 정작 성경이 증언하는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을 거부했고, 결국 십자가에 못 박는 일에 앞장섰습니다. 이 사실은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질문을 던집니다.
성경 지식을 많이 아는 것과 성경 저자의 의도를 아는 것은 같은가?
성경을 문자적으로 잘 지키는 것과 성경이 증언하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같은가?
예수님은 당시 종교 지도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 (요한복음 5장 39절)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하는 책입니다. 그런데 성경을 읽으면서 예수님을 보지 못하고, 오직 율법과 명령과 행위만 보게 된다면 우리는 성경을 가장 열심히 읽으면서도 성경의 핵심을 놓칠 수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의 비극은 성경을 안 읽은 데 있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비극은 성경을 읽으면서도 예수님을 보지 못한 데 있었습니다.
문자에 갇힌 신앙은 결국 자기 의로 흐른다
성경을 문자로만 읽으면 신앙은 쉽게 행위 중심으로 흘러갑니다.
“더 사랑해야 한다.”
“더 용서해야 한다.”
“더 거룩해야 한다.”
“더 순종해야 한다.”
“더 착하게 살아야 한다.”
물론 이 말들이 틀린 것은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은 사랑해야 하고, 용서해야 하며,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하지만 문제는 순서입니다.
내가 사랑하고, 용서하고, 순종해서 하나님께 인정받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먼저 은혜를 받았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 먼저 용서받았기 때문에 용서하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은혜로 구원받았기 때문에 순종의 열매가 맺히는 것입니다.
이 순서가 바뀌면 복음은 율법이 됩니다. 은혜가 먼저가 아니라 행위가 먼저가 되면, 신앙은 기쁨이 아니라 짐이 됩니다. 예수님을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열심을 의지하게 됩니다. 십자가의 공로가 아니라 나의 순종과 나의 성화와 나의 도덕성을 붙들게 됩니다. 이것이 문자에 갇힌 신앙의 위험입니다.
가장 경건해 보이는 사람이 예수님을 거부할 수도 있다
바리새인들은 세상적으로 보면 매우 착하고 경건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안식일을 목숨 걸고 지킬 정도로 율법에 진지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볍게 여기지 않았고, 삶의 세부 영역까지 규칙을 적용하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사람들이 예수님을 죽였습니다. 이 사실은 매우 충격적입니다. 세상적으로 가장 악해 보이는 사람이 아니라, 종교적으로 가장 경건해 보이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거부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들의 의가 예수님의 의를 받아들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자신들이 쌓아 온 율법적 의와 종교적 열심이 있었기 때문에, 오직 은혜로 죄인을 부르시는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의 은혜는 자기 의를 붙든 사람에게는 불편합니다. 왜냐하면 은혜는 인간의 공로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은혜는 이렇게 말합니다.
“네가 쌓은 의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 아니다.”
“네가 지킨 율법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다.”
“네가 착해서 받아들여지는 것이 아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만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다.”
자기 의를 붙든 사람에게 이 말은 기쁨이 아니라 모욕처럼 들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복음은 바로 이것입니다. 나를 살리는 것은 나의 의가 아니라 예수님의 의입니다. 나를 구원하는 것은 나의 행위가 아니라 예수님의 십자가입니다.
“십자가에서 내려오라”는 유혹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사람들은 예수님을 조롱하며 말했습니다.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이 말은 단순한 조롱이 아닙니다. 영적으로 보면 이것은 가장 치명적인 유혹입니다.
만약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내려오셨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십자가는 남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십자가에는 예수님이 없었을 것입니다. 즉 빈 십자가가 되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없는 빈 십자가는 위험합니다. 왜냐하면 그 빈자리에 인간이 자기 행위와 공로를 채워 넣기 때문입니다.
“내가 이만큼 기도했다.”
“내가 이만큼 봉사했다.”
“내가 이만큼 순종했다.”
“내가 이만큼 사랑했다.”
“내가 이만큼 말씀을 지켰다.”
이렇게 예수님의 피와 은혜가 있어야 할 자리에 인간의 행위가 들어가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십자가에는 예수님이 달려 계셔야 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계실 때, 인간의 공로가 들어갈 자리는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끝까지 십자가에 달려 계셨다는 것은, 인간이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기 때문에 주님께서 끝까지 대신 담당하셨다는 뜻입니다. 십자가는 인간의 공로를 보태는 자리가 아닙니다. 십자가는 인간의 공로가 완전히 무너지는 자리입니다.
예수님의 은혜를 모르면 신앙은 불편해진다
은혜를 모르는 신앙은 늘 불편합니다. 예배도 부담이 되고, 순종도 부담이 되고, 말씀도 부담이 됩니다. 사랑해야 한다는 말도 무겁고, 용서해야 한다는 말도 괴롭고, 거룩해야 한다는 말도 압박이 됩니다. 왜냐하면 그 모든 것을 내 힘으로 해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복음은 우리에게 먼저 예수님을 보게 합니다.
내가 사랑하기 전에 예수님이 나를 먼저 사랑하셨습니다. 내가 용서하기 전에 예수님이 나를 먼저 용서하셨습니다. 내가 순종하기 전에 예수님이 나를 위해 먼저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그러므로 기독교 신앙의 출발점은 나의 결심이 아닙니다. 나의 열심도 아닙니다. 나의 도덕성도 아닙니다. 기독교 신앙의 출발점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입니다.
이 은혜를 알 때, 순종은 억지 의무가 아니라 감사의 열매가 됩니다. 사랑은 자기 증명의 수단이 아니라 받은 사랑의 흘러감이 됩니다. 용서는 내가 의로운 사람임을 보여 주는 행위가 아니라, 내가 용서받은 죄인이라는 사실에서 나오는 반응이 됩니다.
순종은 구원의 조건이 아니라 은혜의 열매다
기독교는 순종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사랑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거룩한 삶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참된 복음은 반드시 삶의 변화를 가져옵니다.
하지만 순서가 중요합니다. 순종해서 구원받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받았기 때문에 순종의 열매가 맺히는 것입니다. 사랑해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먼저 받았기 때문에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거룩하게 살아서 은혜를 얻는 것이 아닙니다. 은혜를 받았기 때문에 거룩을 향해 나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복음의 순서는 언제나 이렇습니다. 은혜가 먼저입니다. 그다음에 믿음이 있고, 그 믿음 안에서 변화가 일어나며, 그 변화의 열매로 순종이 나타납니다. 이 순서를 잃어버리면 우리는 다시 율법으로 돌아갑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말하지만, 실제로는 자기 행위를 의지하게 됩니다. 십자가를 말하지만, 실제로는 빈 십자가 위에 내 공로를 붙이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도 같은 위험에 빠질 수 있다
우리는 바리새인들을 쉽게 비판합니다. 그들은 율법주의자였고, 외식하는 사람들이었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오늘날 교회도 같은 위험에 빠질 수 있습니다. 성경을 읽지만 예수님을 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말씀을 지키려 하지만 십자가의 은혜를 의지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예배를 드리지만 은혜보다 자기 열심을 붙들 수 있습니다. 순종을 말하지만 그 순종이 예수님의 사랑에서 흘러나온 것이 아니라, 자기 의를 쌓기 위한 수단이 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바리새인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성경을 많이 아는 것은 중요합니다. 하지만 성경이 증언하는 예수 그리스도를 보는 것은 더 중요합니다. 말씀대로 살아가려는 태도는 귀합니다. 하지만 그 순종이 십자가의 은혜에서 흘러나오는지 점검하는 것은 더 중요합니다.
성경의 목적은 우리를 십자가로 이끄는 것이다
성경은 도덕책이 아닙니다. 성경은 인간에게 “더 착하게 살아라”라고만 말하는 책이 아닙니다. 성경은 인간의 죄와 한계를 드러내고, 인간이 자기 힘으로는 하나님의 기준에 이를 수 없음을 깨닫게 하며, 결국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성경을 문자로만 읽으면 우리는 끊임없이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가”에 갇히게 됩니다.
그러나 성령 안에서 성경을 읽으면 우리는 “예수님께서 나를 위해 무엇을 이루셨는가”를 보게 됩니다. 그리고 그 은혜를 깨달은 사람은 억지로 말씀을 지키는 사람이 아니라, 은혜에 감격하여 사랑하고, 용서하고, 섬기며 살아가는 사람으로 변화됩니다. 기독교의 핵심은 인간의 행위가 아닙니다. 기독교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순종은 중요합니다. 그러나 순종은 구원의 조건이 아닙니다. 순종은 은혜를 받은 사람에게 나타나는 열매입니다. 성경의 목적은 우리를 자기 의로 세우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의 목적은 우리를 십자가 앞에 무릎 꿇게 하는 것입니다. 그곳에서 우리는 비로소 깨닫게 됩니다. 나를 살리는 것은 나의 행위가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라는 사실을.